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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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과 원인== 많은 학자들이 그 특성과 원인에 대해 논했는데, 특성과 원인을 구분하기 어려워 한 목차에 담아본다. ===소크라테스. 특성을 소유하는 것.=== 그가 말했던 사랑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그는 사랑이란 '자신이 가지지 못한 특성을 영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라 말했다 전해진다.<ref>향연</ref>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 그렇다고 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특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의 중간지점에 있는 상태라 말했다. 무언가의 결핍을 깨닫기 위해선 그 무언가를 일부 소유하고 있어야 하기에. 사랑한다는 그 자체로 그것을 가지지 못했지만, 그것을 일부 소유한 것이라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추구한다. 또한 그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한다. 즉, 추구자는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천국에선 배우자가 없다(의미없다?)'는 성경의 말씀과도 통한다. 이미 자신이 사랑이 된 상태에선 굳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추구할 필요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칸트. 흡족의 감정.=== 그는 사랑을 미와 관련된 흡족의 감정이라 보았다. 그 안의 '자애'는 인간 안에 자리하고 있는 동물적 소질이나 인간적 소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자연적 치원에서 기계적으로 사랑하거나 비교를 통해 사랑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런 주관적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자애의 원리는 결코 실천법칙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인 의무인데 반해서 옳은 법칙이나 정의에 대한 존경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결혼 이전의 성적 사랑은 동물적 활동으로 파악하며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서로의 성적 기관을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다 보았다. 결혼이 서로의 성적 기관을 사용하는 물건적 관계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이를 넘어 서로를 인격체로 대우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주장한다. 즉, 부부란 물건적이면서 인격적인 관계라 말한다.<ref name=":0">김석수."칸트와 헤겔의 철학에서 사랑과 존경". 철학논집(2016.02):245-269</ref> 사랑은 하고 싶은 것이지, 해야 할 의무에 해당하는 감정은 아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은 타인에게 어떤 의무도 부과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존경은 자애를 끊어내 그 어떤 값도 매길 수 없는, 시장가격과 애호가격 모두를 초월해 있는 존재에 참여하는 감정이라 말한다. 욕구의 대상이 되는 목적에 관계하기보단, 실천적으로 명하는 법칙을 대상으로 삼는다. 목적이 아닌, 정의를 추구한다. 사랑이 정성을 다한 만큼 정성을 요구하는 반면, 존경은 타인의 인격성에 손상을 입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제재를 가하는 데 집중한다. 사랑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부덕이지만, 존경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패악이 된다.(관계가 깊어질수록 내 행동은 점점 부덕이라기보단 악행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느낌이다. 점점 편해지면서 인격성에 공격을 가하게 된다.) 그는 동물적 감각을 넘어 스스로를 제재할 수 있는 한 인격체로서 서길 요구하는 듯하다. ===헤겔. 정반합.=== 옳음으로만 향해 있는 칸트의 도덕적 자율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덕과 세속의 길 사이의 변증법적인 종합을 시도하였다. 칸트의 존경감정은 행복을 배제하려 하지만, 결국 다시 행복으로 회귀하는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헤겔은 대상 지향적이고 혈연에 기초한 자연적 사랑만으로는 혼인이 성립될 수 없고, 자유의지가 지향하는 윤리적 이념과 관계를 맺어야 혼인이 성립될 수 있다 보았다. 그는 사랑, 존경 둘 중 하나만으로는 인륜성을 마련할 수 없다 보았다. 칸트의 숭고는 모든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세계를 추상하고 신으로 향하지만, 거기엔 추상적 보편이라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 헤겔은 사랑이 타자를 추상화하는 도덕적 의무에 버림을 받을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로 하여금 그 한계를 자각하게 하고 이를 넘어서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율법을 넘어서고 율법조차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예수의 화해하는 사랑을 칸트의 존경감정보다 우위에 두려 한다. 칸트의 존경감정이 낳을 수 있는 금욕주의의 불행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ref name=":0" /> ===니체. 힘에의 의지.=== 미녀와 야수, 뱀파이어이야기 등에 끌리는 것은 이들이 원초적 힘과 깊은 고통에 대한 갈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때로 이성의 질서보다 강렬함을 원한다. 우리를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미지의 힘과 가능성에 대한 동경이 사랑의 감정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사랑은 무관심의 상태를 뛰어넘고 우리를 살아 있다고, 그것도 숭고하게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열정이다.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미지의 불가능한 힘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능했었던 힘과 의지에 대한 동경,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한 힘의 극대화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그 기능과 효용의 측면에서 정량화되고 계산과 예측가능하며 동시에 파편화되고 대체가능해진 인간의 왜소화와 상실로 인해 더 이상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 말한다. 사랑과 같은 도덕적인 단어들이 사실은 힘에의 의지가 쓰고 있는 가면에 불과하다 주장한다. 사랑의 욕구가 쉽게 만족될수록 그 사랑의 대상이 갖고 있는 심리적 가치가 하락한다는 사실도 스스로의 힘을 입증하기 위해 저항을 필요로 하는 힘에의 의지의 특성을 반영한다. 소유욕과 사랑은 동일한 뿌리에서 자라난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종종 삶이 너무 허무해서 획득하고도 바래지 않을 것을 찾아보려 하나.. 쉽지 않다. 그저 게임이나 성취, 획득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의 힘을 증명하고 힘을 얻기에 힘쓸 뿐. "소유물은 소유에 의해 시시한 것이 된다. 쾌락도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을 항상 새로운 것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하려 한다." 사랑의 순간에 드러나는 그 고상하고 진귀한 성질들은 당연히 사랑에 빠진 당사자의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특성이 아니다. 니체는 이러한 사랑의 기만을 경계하여 사랑을 이유로 행하는 결혼은 금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기독교에서 사랑은 단어의 애매함과 다의성에 기대어 물리적 실제일 수 없는, 원수마저 사랑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기독교인을 행복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삶을 축복받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ref>'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p.266. 양대종."니체 철학에서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철학연구(2018.02):297-321에서 재인용.</ref> 사랑은 실재하는 것을 실재하는 것과 다르게 보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착시를 통해 고통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사랑을 통해 만들어진 이상들은 환영을 통해 유사만족을 야기한다. "다른 사람이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정반대의 방식으로 살고 행하고 느낀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결국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바꾸는 일이 사랑인 것이다.<ref>양대종."니체 철학에서 사랑의 의미에 대하여". 철학연구(2018.02):297-321</ref> ===힌두교.=== 힌두교에선 사랑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 말한다. 사랑은 믿음과 희망이 훌륭한 덕목이게끔, 근본적인 의미부여의 역할을 갖고 있다. ===진한생각. 깨지기 쉬운 것.=== 좋은 과학이론은 반증 경로의 수가 많으면서 반증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사랑은 깰 수 있는 방법이 수만가지나 되면서도 깨지지 않는 것이라 보아야 할까, 아니면 반증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라야 할까. 내 연인이 내 친구네 집에 가는 것을 막으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못마땅해하면서.. 나는 결혼이 두려워졌다. 그렇게 난 다른 대안을 떠올려 보려 한다. 다른 여자, 다른 만남의 가능성, 결혼 자체의 포기. 가지 않은 길은 매끄러워 보여 눈길이 가기 마련, 그러나, 이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다른 길에서 이 길을 부러워했으리라. 때문에 두려워 깨질 것 같으면서도 깨지지 않는다. 결혼이 필수는 아니라지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라이 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굳이 다른 만남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굳이 한 사람에게 속박되고, 굳이 제도에 속박되고자 결심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야. ====희귀하다.==== 사랑에 열광하고 사랑이라는 현상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것이 희귀재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어디에나 널려 있다. 종합하자면, 누구나 얻고싶어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획득했고, 획득과정이 쉽지 않기에 희귀재로 통하는 게 아닐까 한다.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 한국에선 '사랑'은 한 단어로 수많은 개념들이 집약된다. 반면, '에로스', '스톨게' 등으로 사랑을 구분하고 해부하려는 시도도 적잖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파편화는 사랑의 본질을 가릴 수 있지만,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엔 커다란 도움이 된다. 인생을 관찰해 보면 사랑하는 일, 결혼하는 일은 진리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공자가 이립, 지천명 따위의 단계를 구분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말했듯 사랑에 대해서도 이런 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0~20살 까지는 필리아, 20~40까지는 에로스, 40~60까지는 스톨게, 60~ 아가페에 이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가히 성인이라 불릴 수 있을 터. 재미있게도 우정은 범위가 넓은 반면, 부모의 사랑은 배타성을 띈다. 사람은 점점 배타적인 사랑을 추구하게 되다가, 마지막에 다시 그 범위를 넓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기형적인 노인이 되고 만다. ====인식을 벗어나게 됨==== 좋아한다는 것은 내 인지 안에 있다. 나는 돈가스를 좋아하고, 여자친구는 떡볶이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대상이 좋아하는 대상일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바로 떠올리긴 어렵더라도 생각해보면 그 갈피를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좋아함의 이유가 사라진 돈가스, 떡볶이는 탐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음식은 맛없다고 불릴 뿐, 좋아함의 틀 안에 들지 못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은 왜 좋은지 설명할 수 있다.(시간이 오래걸릴 지라도) 그러나, 한 대상의 일부분이 좋아지고, 또 다른 일부분이 좋아지고, 또다시 다른 부분이 좋아지고.. 좋아짐이 중첩되어 어느 정도의 복잡성을 넘어섰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이 왜 좋았는지 잊어버리고 만다. 마치 대머리에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심었을 때 언젠가 풍성한 머리칼이 되듯, 양적인 변화가 어느새 질적 변화로 이어지고 만다. 그리고 우린 이렇게 복잡해진 좋아함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이성적인 처리가 불가능해지니, 감성에 처리를 넘긴다. 사랑의 시작은 분명 좋아함이다. 하지만 점차 그 이유는 흩어진다. 그리고 심지어 그 이유가 사라졌을 때에도 사랑은 남는다. 좋아함에 본질이 있다면, 사랑은 실존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것. 그 이유조차 잊혀지는 것. 그 모든 이유가 잊혀지고 순수하게 결과만이 남았을 때. 그 상태가 사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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